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시원한 공기에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요즘 기온은 연일 30도를 제멋대로 넘나들고 있었고, 습도 역시 불쾌지수를 100에 가깝게 만드는 데 일조했기에, 차갑고 건조한 진료실 안의 공기는 반갑기까지 했다. 나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진료실 문을 닫았다.
진료실 안에는 깔끔한 인상을 주는 외모의 의사가 앉아 있었다. 두꺼운 안경에 잘 빗어넘긴 보기좋게 늙은 중년. 그의 주름살에서는 그가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의 고단한 여정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일종의 존경심마저 불러일으키는 주름살이었다. 나는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그의 앞에 앉았다. 의사는 나를 보더니 차트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지난 주 수요일에 검진 받으셨던 분 맞죠? 유세민 씨."
"네."
나는 그 때 수영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주 일요일에 친구들과 오션랜드라는 해양 테마파크에 놀러가기로 했었다. 우리 셋 다 싱글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은근히 행락지에서의 로맨스에 대해 기대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남성들이 흔히 가지는 성적 판타지에 관한 내용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입에서 침이 흐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접어두고 가져갈 짐들과 가서 입을 옷들에 대한 생각으로 바빴다.
"혹시 혼자 사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차트를 찾은 의사는 내게 물어왔다. 나는 이런 형식적인 정기검진 따위 얼른 끝내고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이 시원한 곳에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작년에 집에서 분가해 나온 이후로는 에어컨을 사용할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의사는 그렇게 말하곤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의 주름살이 잠시 몇 개는 더 늘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건 뭔가 신호 같았다. 아니, 확실한 신호였다. 나는 방금 전까지 달아올랐던 흥분이 싹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피가 식는다는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류의 불안은 항상 그렇듯 불행하게도, 정확했다. 눈 앞이 아찔했다.
다음 순간부터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내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것들은 허공에 둥둥 떠 다녔고, 나는 이리저리 단어들의 나열, 아니 홍수에 휩쓸려다녔다. 나는 파도가 칠 때마다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도중 어쩌면 정신을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병원을 나올 때쯤은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밖은 덥고 푹푹 쪘다. 저녁 노을이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지만 아직 아스팔트에선 낮에 달궈진 열기가 올라와 머리를 아찔하게 했다.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현기증 때문인지 거리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현실감을 찾을 수가 있었다.
선천성, 결핍, 노화, 심장성, 증후군, 수술 같은 식상한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나는 되짚어 가다가 한 가지 진부한 단어를 떠올렸다. 시한부. 그건 정말 짧고도 간결하게 나의 상태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의사는 몇 시간 동안 어려운 의학 용어를 들어 차분히 설명했고, 그런 설명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 의대에 들어가고 레지던트 생활을 하고 돈을 모아 병원을 차렸겠지. 그 모든 노력이 고작 시한부라는 말을 하기 위해 존재했다는 게 참 웃겼다.
나는 담배 생각이 간절히 들어서 입에 담배를 물었다. 그러나 의사의 말이 생각나서 다시 집어넣고 말았다.
'술 담배는 절대 안 됩니다. 끼니를 거르셔도 안 되고, 자극적인 음식도 피하세요. 나트륨 섭취도 되도록 적정량으로 조절하고 수면도 과다하지는 않게 충분히 취해주세요. 스트레스나 육체적으로 피로가 쌓이는 일도 되도록 피하세요.'
'얼마나 남았나요. 저는.'
'지금 상태로는 언제라도 위험해질 수 있지만 어느 날이라고 딱 잘라 말씀드릴 수는 없군요.'
'수술을 받으면요?'
'시술 후 2년 정도가 보통이고, 5년까지 생존한 사례도 있습니다.'
'수술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내일 당장 위험해질지도 모르지요. 저로서도 환자분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 나이는 겨우 스물 다섯이었다. 그리고 나는 불확실한 삶과 확실한 죽음 사이의 기로에 서 있었다.
정말 오뉴월 거지 발싸개처럼 더운 날이었다.
술을 마시지 말란 의사의 말 때문에 나는 술자리에서 한약 핑계를 대고 입에 술을 대지 않았다. 친구들은 온통 오션랜드에 갈 생각으로 가득했다. 가서 어떻게 작업을 걸고, 어디가 꼬시기 좋은지, 거기서 알바하는 선배한테 5만원이나 되는 스테이크를 사주고 알아냈다며 그 주제로 시끌벅적하게 안주를 삼았다. 물론 나는 탄산음료조차 무서워 물로 술을 대신해야 했다.
한참 동안 같은 주제를 고장난 비디오 테입처럼 반복하던 그들은 마침내 술에 떡이 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약간은 힘이 빠진 상태가 되었다. 나는 소주에 대한 간절한 욕망을 느끼며 고기만 씹어 먹었다. 그걸 보던 한 친구가 베시시 웃으며 내게 농을 걸었다.
"어유, 아무리 한약이라지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나 같으면 그냥 마신다."
"뭐 임마. 비싼 돈 들여서 마시는 한약 헛거 되면 니가 책임질래? 게다가 잘못하면 부작용까지 있댄다."
"걍 먹고 뒈져. 기껏 인생 살면서 하는게 더 살자고 한약 챙겨먹는 거냐? 넌 왜 사냐? 즐겁자고 사는 거 아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헤헤 웃으며 술을 쭉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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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전에 쓰던건 쌌음 'ㅅ';